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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열전] 서양화가 오흥구 화백(畫伯)

전생 화업(畫業) 50년, 팔순 기념전 개최.

등록일 2020년10월16일 00시33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인생 고갯길 80에서, 이제 다시 화공의 인생을 시작하는 서양화가 오흥구 화백. 콜레라의 공포가 막 시작되기 바로 직전 다행히도 제목에서처럼 오흥구 화백은 화공(畫工)이 걸어온 반세기의 유물인 <오흥구 화업(畫業)50년 팔순 기념전>을 지난 2월15일부터 보름간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미술세계’에서 가졌다.

 



 

그리고 이어 지난 8월23일부터 고향인 춘천 문화예술회관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기념전을 갖기로 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전시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과 춘천에서의 전시회 작품 화집까지 제작 완료한 상태에서 춘천 전시회가 올스톱이 된 것이다.

 


 

서울전시회는 다행히도 아무 방해물 없이 순조롭게 진행돼 동료이기도 한 원로 화가인 구자근, 박순배. 신철균, 유병훈, 최영식 황영근 작가 등과 30여 명이 ‘화우동행전’이란 타이틀로 또 다른 전시를 선도해 눈길을 끌어줘 서울전시회가 더욱 빛났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귀하게 편집돼 펴낸 '오흥구 화법 50년, 팔순 기념전' 도록(圖錄) 첫 장 평론(評論)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춘천사범학교 시절 조회 때 미술대회의 상은 모조리 훑어 가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때 부상(副賞)으론 대부분 탁상시계 정도였는데 상 받은 그 학생은 ‘그 많은 자명종 탁상시계를 다 어떻게 하나?’로 조회 때 집합한 대부분 학생들의 궁굼증이 ‘걱정?’으로 변해 아주 궁굼해 죽을뻔 했다”고 한다. ㅎㅎㅎ 

 


 

이 평론을 쓴 당시 춘천사범학교 동창인 이흥우 씨는 文學作家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오화백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계를 두루 섭렵했다. 수채화, 유화, 문인화, 서예, 분재, 꽃 가꾸기 등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두 그 영역에서는 전문가 경지에 이르는 놀라운 재주꾼이다. 그 어느 전생의 화공이 아니었을 리가 없는 사람이다. 오 화백은 미술에 관해서는 끊일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산수(80)에 이르렀어도 그려야 하고 나무를 길러 가지를 삭둑삭둑 쳐 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의 집에는 화실(畫室)이 있고 그의 밭에는 분재(盆栽)가 되기를 기다리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세상을 표현할 오방색이 뒤섞이느라고 늘 복잡하게 돌아간다. 한마디로 그는 마르지 않는 화공(畫工)의 샘터다" 이렇게 오흥구 화백(畫伯)을 를 평하고 있다.

 


 

"오흥구 화백이 세상에 작품을 선보이길 개인전 20여 회, 단체 전시회가 300여 회에 달하고 있다. 횟수가 불명확한 것은 계속 진행형이라서 세는 일조차 헷갈린다. 오 화백은 오래 살 거다. 의욕이 넘쳐나서 그 욕구가 해소되지 않고는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어서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 그리고, 만들고, 하는 대로 하다가 힘이 다해서 저승으로 간다 해도 다시 화가로 환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생이 화공(畫工)이었고, 이승은 화가(畫家)였으니 내생도 틀림없이 화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집념의 사나이‘란 어휘가 오 화백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기는 하다가도 성취의 사나이가 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성취를 계속 음미하면서 살아온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산수(傘壽)의 나이에 앉아서 자식들 절 받고 부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팔방으로 뛰면서 그림을 걸고 여기 와 보라고 소리치질 않는가. 오 화백은 늙을 새가 없어서 언제쯤 늙은이가 되려는가 아직 청춘일세 그려...."

이상은 학교 동창인 이흥우 文學作家가 이번 ‘오흥구 화업 50년, 팔순 기념전‘의 圖錄 <前生이 畫工이었던 오흥구 화백>의 평론에 적혀진 내용이다.

 


 

1941년 춘천시 신북읍 산천리에서 태어난 오흥구 화백은 1958년 춘천사범학교에 입학해 초등교사의 꿈을 키웠다.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술 학도로서의 소양을 쌓으며 불철주야 그림 그리기에 붓이 마르지 않았다. 6.25 전란 이후 미술교육은 도화(圖畫)시간이었고 16절 모조지를 도화지라고 부르던 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팔고 사는 시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도 크레용이 전부였다. 도화 시간은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리는 임화(臨畫)가 전부였다, 특별히 그림 그리기를 지도하는 선생님도 없었고,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시절에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당시에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등 초상화를 잘 그려서 담임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고 각종 미술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서 많은 상을 받아 왔다. 
대충, 이 정도가 팔순 기념전을 갖은 오흥구 화백의 어린 시절, 산 역사의 기록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모든 이의 꿈만 같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처럼 들린다.

 


 

서양화가 오흥구 작가는 지난 2월 서울에서 가졌던 ‘화업 50년 팔순 기념전’에서 그동안 자신이 완성한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
풍경, 인물, 정물, 포스터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실제 오화백의 작품 대부분이 유화(油畫)‘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만큼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나 소재, 표현기법은 어느 화가 보다 다양하다. 하지만 오흥구 작가가 살아온 길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이내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든 키워드는 ‘자연’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 그 자연이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근간인 된 것이다.

 


 

 

오흥구는 “어려서부터 농촌을 벗 삼아 지내면서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 그 진솔한 아름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나의 창작활동의 배경이자 모체는 항상 자연”이라며 “강원도는 산야(山野)의 신비로운 사게절이 주는 美的 아름다움, 다양한 색의 조화는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오흥구 화백은 스스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항상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작품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지만 ‘오흥구식’ 表現法은 그의 작품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집안을 돕겠다는 생각에 미술대학 대신 사범학교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를 길을 걸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다시 붓을 잡는 그 인생 이야기처럼 작품 속에는 그의 삶이 녹아있듯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흥구 화백 인터뷰]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아동 미술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어린이 미술 실기 지도에 공을 쏟아 각종 실기대회에서 많은 입상자와 단체 우승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원 아동미술교육연구회에서도 열성을 다해 미술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런 노력이 교육계에서 인정받아 대통령표창과 교육감표창 등 각종 상을 받기도 했다. 교직 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하기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오흥구는 1970년 춘천초등학교 근무 당시 이수억 화백, 김봉국, 김정희 교수, 최재혁, 안호범 선배 등과 함께 춘천 일요화가회를 조직하여 총무직을 맡는가 하면 야외스케치를 많이 다니면서 개인적인 작품 할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흥구 화백은 지금도 자신을 “나의 창작활동의 배경이자 모체는 항상 ‘자연’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만끽해 준다”며 더욱 “강원도 산야의 신비로운 사계절 변화가 주는 미적 아름다움과 다양한 색의 조화는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스승이며 영감과 표현, 욕구의 에너지가 되어 이것을 작품 속에 담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화백은 평생 아동교육에 헌신한 화신처럼 본인의 화풍을 지나치리만치 구상작(具象作)에 몰두하고 고집하다 보면 실증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순박하고 꾸밈없는 어린이들만의 풍부한 표현언어와 심리, 욕구, 사고(思考)의 구조 등이 투사되어있는 세계, 아동화에는 이렇듯 많은 신비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 무한한 표현 가능성과 새로운 영감을 주면서 자기의 그림도 어린이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잠시 감흥에 젖기도 했다.

 


 

특히 그는 한국화와 문인화, 서예 등에도 관심이 많아 정년퇴임 후에는 문화센터와 동호인 모임인 샘물회, 연묵회 등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며 잠시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 
천생 붓쟁이인 그는 그래서 그간 닦은 실력으로 ‘대한민국 유림서예대전’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을 거쳐 초대작가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이제 팔순을 맞아 노년기에 접어든 화업(畫業) 50년의 오흥구, 그가 그동안 생명과도 같이 틈틈이 작업한 작품들을 한곳에 모아 화집과 함께 지난 2월 서울서 1차 전시회를 가졌을 때 그는 이렇게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모천(母川)을 찾는 연어처럼, 내 앞으로의 작품활동은 눈 앞에 펼쳐진 사물에 대한 영감을 얻어 과장되지 않은 솔직한 나만의 표현기법을 찾아 성숙된 작품세계로 몰입하고 싶다”면서 “아름다운 작품세계를 통해 나의 자아실현을 꿈꾸며,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서두르지 않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겠다”라고 피력 한바다.

 

 

팔순 화백(畫伯) 오흥구다운 명언(名言)중의 명언이다.

“모천(母川)을 찾는 연어처럼” 그의 말 말 따나 그의 전생(全生) 화공의 역사가 연어처럼 망망대해 수 만 리 파도를 헤치며 고향집으로 돌아오듯 그림에 대한 오흥구의 집념 하나를 단적으로 축약한 금언(金言)이기도 하다.

 


 

오흥구 화백은 영원히 빛바래지 않는 그의 그림 유화(油畫)같이...  
<모천(母川)!!!~~~ 그리운 어머니의 강(江)처럼 말이다>
유독 가정적인 오화백은 그가 신념으로 새겨왔던 ‘家和萬事成“의 표상처럼 3대가 함께 사는 모범적인 가정을 이뤄 왔다.
항상 어디서나 가족과 함께한다. 가족의 힘이 지금의 오화백을 우뚝 서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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